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유시 참변 (문단 편집) === 960여 명이 희생당했다? === 이 사건으로 [[카더라 통신|독립군 960명이 전사했다는 출처불명의 썰]]이 있지만 실제로는 '''최소 36명'''이다. 이건 우파 성향의 역사학자 [[권희영]] 교수의 논문에서도 인정한 사실이다.[* 권희영, 자유시 사변 연구, 한인 사회주의 운동연구, 서울: 국학자료원, 1999, 208~209p.] 일반적으로 학계에선 '''사상자'''[* 사망자가 아니라, 사망자와 부상자를 모두 포함하는 용어다.]를 수십명 단위로 본다.[* 윤상원,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: 1918-1922, 학위논문(박사)-- 高麗大學校 大學院: 韓國史專攻 2010. 2, 218p.] >한편, 극동 공화국 정치안보국 본부는 1921년 7월 16-19 일 이 사변을 보고하면서, '''한인의 피해는 현저히 적었다'''고 전했다: “스보보드넨스키 지역에서 사령관의 무장해제 명령에 따르지 않은 [[사할린부대]]와의 충돌이 발생했다. 명령은 부대 내에 반형멱적인 요소가 있었기 때문에 내려진 것이었다. 충돌로 인해 '''부대 총 인원 1026명 중 830 명이 항복했고, 나머지 일부는 죽거나, 부상을 입었고, 또 일부는 도주했다.'''”(56: 6 러시아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. F. 372. Op. 1. D. 114. L.68 ) 극동 공화국 인민혁명군 정보에 따르면, 비상위원회 정보와 마찬가지로 '''한인 36명이 사망하고, 60명은 제야강에서 익사했으며, 실종자는 60명, 무장해제된 자는 860명에 달했다.''' (57: 토루쿠노프 A.V. 한국사(새로운 관점). M., 2003. P. 303-304 ) '실종자' 중에는 도망자들이 우세했다(박은 70 명의 병사와 함께 만주로 도주해 그곳에서 홍호자들과 함께 유격대원으로 활동했다.). 그러나 공식 보고서는 사령관들이 제 5 군 군사재판소에서 조사를 받았던 이미 무장해제된 한인들에 대해 징벌을 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. ‘아무르사변’은 한국해방운동에서 깊고 오래된 분열을 더 악화시켰다. >---- >A.G. 테플랴코프, 「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(Nestor Kalandarishvili)(1876–1922)의 초상화: 형사범이자 모험가, 파르티잔, 붉은군대사령관 」, > >DOI: 10.31518/2618-9100-2018-1-4 >УДК: 63.3(571.51/.55/.621)94(47) > >A.G. 테플랴코프 = 테플랴코프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–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, 역사학준박사, 노보시비르스크 국립경제경영대학교 부교수. E-mail: teplyakov-alexey@rambler.ru > >원문: >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, 2018,「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(1876-1922): УГОЛОВНИК-АВАНТЮРИСТ,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」,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«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», 47~51쪽 (https://cyberleninka.ru/article/n/k-portretu-nestora-kalandarishvili-1876-1922-ugolovnik-avantyurist-partizan-i-krasnyy-komandir ) > >[[https://cafe.naver.com/booheong/194250|부흥카페 제공]], [[https://www.fmkorea.com/index.php?mid=best&document_srl=3008795647|펨코 제공]] 게다가 자유시 참변의 피해자인 상해파의 일원이었던 [[계봉우]] 역시 이후 자신이 집필한 회고록인 <조선역사>에서 사망자가 36명이었다고 못박았다. 이는 36명이 사망했다는 주장의 신빙성을 더욱 높여 주는 주장이다. >(자유시 사변의)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? '''36(구)의 묻음(무덤)을 보게 되었고''' 投江(투강)한 人數(인수)에 있어서는 제야강에 물어야 할 터인데, 제야강은 말없이 밤낮에 흐를 뿐이다. 합동민족군대는 의용군 측의 대소 장교 20여인을 포로로 하여 가지고 이르쿠츠크로 회환하였다. >---- > 『조선역사』 권3, 133~134쪽 [[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]]에는 사망자 272명을 포함해 600명이 넘는 희생자를 냈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이 사전의 참고문헌[* 『한국독립운동의 역사: 국외3.1운동』21(김병기·반병률,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,2013) (실제로는 2009년 발간된 서적이지만 대백과사전에서 오류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.) [[http://m.riss.kr/search/detail/DetailView.do?p_mat_type=d7345961987b50bfcontrol_no=a72ec9499fbe2ec8ffe0bdc3ef48d419|#]] , 『재외동포총서 러시아: 중앙아시아 한인의 역사 (상)』7 (국사편찬위원회,국사편찬위원회,2008)]은 모두 '''2010년대 이전의 학설'''에 기반을 둔 것이다. 또 첫 참고문헌에는 자유시 참변에 대한 서술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볼 때 자유시 참변에 대한 실질적 참고문헌은 후자뿐이다. [[http://encykorea.aks.ac.kr/Contents/Item/E0072193|#]] [[https://search.i815.or.kr/main.do|메인에 나온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볼 수 있다.]] '재외동포총서'는 자유시 참변 이후 양측의 주장만 기록되어 있고 사망자 수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. 그리고 이 서적에서도 독립군측의 주장은 '''사망자 72명'''이다. [[http://db.history.go.kr/item/level.do?sort=levelId&dir=ASC&start=1&limit=20&page=1&pre_page=1&setId=-1&prevPage=0&prevLimit=&itemId=oksr&types=&synonym=off&chinessChar=on&brokerPagingInfo=&levelId=oksr_007_0020_0010_0050&position=-1|#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